천 개의 파랑(천선란) : 저마다의 속도로, 함께 호흡하는 진정한 '보편'의 의미

Book 2021. 8.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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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개의 파랑

저자 천선란 | 출판 허블 | 발매 2020.08.19

 


 

 

 

책 소개

한국과학문학상 장편 대상 수상작. 2019년 첫 장편소설 <무너진 다리>로 SF 팬들에게 눈도장을 찍었고, 2020년 7월, 소설집 <어떤 물질의 사랑>을 통해 우리 SF의 대세로 굳건히 자리 잡은 천선란. 2019년 한국과학문학상 장편 대상 수상작 <천 개의 파랑>은 이를 방증하듯 출간 전부터 많은 SF 팬들의 뜨거운 기대를 모았다.

<천 개의 파랑>은 한국과학문학상 심사위원 김보영에게 “천 개의 파랑이 가득한 듯한 환상적이고 우아한 소설”, “이미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유명 작가의 작품이라 해도 믿을 법했다” 라는 찬사를 이끌어냈다. 이는 김창규 작가가 한국과학문학상 심사평에서 언급한 말과 맥을 같이 한다. “더 이상 좋은 한국 SF의 가능성’이란 얘기는 듣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기뻤다. 그만큼 SF를 충분히 소화하고 빚은 작품들이, 가능성을 넘어 다양한 길을 정하고 완성되고 있었다.” 천선란은 더 이상 SF의 가능성이 아니다. 그는 이미 완숙하게 무르익은 상태로 우리에게 도달한 ‘준비된 작가’다.

SF가 진보하는 기술 속에서 변화하고 발전하는 모습을 예견하는 장르라면, <천 개의 파랑>은 진보하는 기술 속에서 희미해지는 존재들을 올곧게 응시하는 소설이다. 발달한 기술이 배제하고 지나쳐버리는 이들, 엉망진창인 자본 시스템에서 소외된 이들, 부서지고 상처 입은 채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있던 이들을 천선란은 다정함과 우아함으로 엮은 문장의 그물로 가볍게 건져 올린다. 그의 소설은 희미해진 이들에게 선명한 색을 덧입히는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저자소개

천선란 (지은이) 
환경 파괴, 동물 멸종, 바이러스를 중심 소재로 잡고 있다. 언제나 지구의 마지막을 생각했고 우주 어딘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꿈꿨다. 어느 날 문득 그런 일들을 소설로 옮겨놔야겠다고 생각했다.
2019 한국과학문학상 장편 부문 대상 수상. 『무너진 다리』(2019) 『천 개의 파랑』(2020) 『어떤 물질의 사랑』(2020) 『밤에 찾아오는 구원자』(2021)

 

 

 

 

 

 

 

❥ 저마다의 속도로, 함께 호흡하는 진정한 '보편'의 의미


.고립.

 

 인류의 탈 것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 걷던 사람들이 말이나 나귀를 타고, 마차를 타고, 자전거를 타고, 자동차를 탄다. 보편적인 기술도 함께 발달했다. 버스, 택시, 지하철 등이 그와 같은 것이다. 이처럼 기술의 발달은 우리에게 편리함과 효율성을 가져다준다. 그러나 새로운 기술이 쉴 틈 없이 쏟아지는 세상 속에서 나는 이러한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기술의 발달이 정말 모든 이들에게 혜택을 가져다주었는가? 《천 개의 파랑》은 기술에서 배제되고, 시스템에서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리며 앞선 의문에 대해 끝없이 고민하게 만든다.

 

 

 

 휠체어 덕분에 걷지 못하던 이들이 움직일 수 있게 된 게 아니라, 버스와 지하철, 인도, 계단, 에스컬레이터 때문에 이동할 수 없게 되었다는 걸. 

 

 

 여기, 휠체어를 타는 이들이 있다. 책 속 '은혜'와 같은 사람들 말이다. 나는 우연히 접한 김원영 변호사의 강연 이후, 휠체어와 함께 하는 삶에 대해 알게 되었다. 관련된 기사나 유튜브 영상을 많이 찾아보았는데, 우리나라에서 휠체어를 타고 살아가는 것은 굉장히 번거롭고 불편해 보였다. 아직 그 흔한 경사로 하나 없는 곳이 많으며, 우리가 일상적으로 타는 버스와 택시 또한 이용하기가 어렵다. 지하철은 휠체어가 이동할 수 있는 휠체어 리프트가 구비되어 있으나, 굉장히 비효율적이고 안전하지도 않다.

 

 

 심지어는 원래 있던 경사로마저 철거하라는 민원이 들어오기도 한다. '자꾸 장애인 장애인 하는데, 그럼 모든 건물에 경사로를 설치해야 하는 거냐'는 말은 놀랍게도 경산시청의 한 공무원의 입에서 실제로 뱉어진 말이다.¹ 그는 아마 '모든 건물에 경사로를 설치하는 것'이 진정으로 보편적인 상태임을 모르는 듯하다.

 


.속도.

 

 우리는 남의 속도에 맞추어 달린다. 심지어는 더 빨리 달리기 위해서 기를 쓴다. 아이들을 영어 유치원에 보내고, 초등학생 시절부터 무수한 양의 공부를 시킨다. 그렇게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쳐 대학교까지의 모든 과정이 20대의 초반에 이르러 숨 가쁘게 이뤄진다. 그 이후의 삶도 크게 다를 것은 없다. 취직, 결혼 등 사회가 규정한 '보편성'을 찾아 끝없이 달린다.

 

 

 기술의 발전도 이러한 우리의 속도에 맞춰서 달린다. 아니, 더 빠르게 뛴다. 그래서인지 새로운 기술을 습득하지 못하는 이들이 도태되는 것은 세상의 이치가 되었다. 컴퓨터와 스마트폰의 등장 이후, 이를 다룰 수 없는 이들이 시장에서 경쟁력을 잃거나, 문화에서 소외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기 시작했다. 시장에서 경쟁력을 되찾고 싶으면 컴퓨터를 배우고, 문화에 합류하고 싶으면 스마트폰을 공부하라는 식이다. 그러나 화면을 볼 수 없는 사람, 자판을 두드릴 수 없는 사람, 그것을 체험할 경제적 조건이 주어지지 않은 사람은 이 세계에서 어디로 사라졌는가? 그들은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자꾸만 지워지고 흐릿해진다.

 

 

 언제부터 '빠름'이 우리 세상을 지배하는 가치가 되었는가. 신기술과 새로운 세상도 좋지만, 그것이 함께가 아니라면 무슨 소용인가. 기술의 발전은 이루어졌지만 '보경'의 남편처럼 목숨을 걸고 일하는 소방관들의 안전은 보장되고 있지 않다. 마음만 먹으면 어디든 갈 수 있는 시대가 열렸지만, '은혜'처럼 휠체어를 타는 이들은 경사로 하나가 없어 이동권을 침해받는다. 전국 곳곳에서 모두가 살기 좋은 세상이라며 슬로건을 내걸지만, 경주마인 '투데이'처럼 동물들은 죽어 나가고 있다. 이러한 기술이 대체 세상에 어떤 도움이 된단 말인가.

 


.호흡.

 

 기술의 발전을 무작정 멈추라는 말이 아니다. 그저 사회의 구석구석 모든 생명체가 저마다의 속도로 달리며, 같은 호흡을 나누는 세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빠름'이 아닌, '느리더라도 함께'의 의미를 되새길 때다. 모두가 기계의 속도를 흉내 내다 탈진하고 이탈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동물은 동물의 속도로, 인간은 인간의 속도로, 기계는 기계의 속도로 걷되, 모두가 같은 호흡을 내뱉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당신은 당신의 주로가 있으니 그것만 보고 달려요. 자신의 속도에 맞춰서요. 

 

 

 우리는 휠체어를 위해 경사로를 설치하는 것보다, 로봇 외골격이 더 주목받는 시대에 살고 있다.² 잘못 규정된 '보편'이라는 단어에 모든 것을 끼워 맞춘다. 이제 우리는 진정한 '보편'의 의미를 되살릴 때다. 지금까지 저질러 왔던 모든 실수를 바로잡고 올바른 길로 나아갈 때다. '실수는 기회와 같은 말'이니, 지금도 늦지 않았다. "우리 모두 천천히 달리는 연습을 할 필요가 있다."


여담

 사실 나는 SF에 관심이 없었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기술들을 논하는 게 어렵고 머리가 아팠다. 《천 개의 파랑》은 내가 가지고 있었던 SF에 대한 편견을 부수어주었다. 김초엽 작가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 이어 두 번째다. 이 책들은 세상의 속도에 점점 벌어지는 사람 사이의 틈을 비집고 고립되었던 이들에게 조명을 비춘다. "SF는 태생부터 인간 바깥으로 밀려난 존재들에 관한 이야기를 해왔다"는 말이 문득 떠오른다.³ SF 소설이 이처럼 고립된 이들을 위한 노래라면 나는 기꺼이 몇 권이고 읽어내고 싶다.

 


출처

1. 경산시청 "장애인 경사로 철거해" 논란… 누리꾼 "싸울 것", 오원석, 중앙일보, 2017,  https://news.joins.com/article/21329061

2. 김초엽, 김원영, 『사이보그가 되다』, 사계절(2021), 21쪽

3. 같은 책, 87쪽

 


 


 

책 속 한 문장

 

"언니는 자유롭고 싶은 거지?"
"나는 이미 자유로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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