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자의 기억법(김영하) : 시간은 절대 가벼워지지 않기에
Book 2021. 9. 27.
살인자의 기억법
저자 김영하 | 출판 복복서가 | 발매 2020.08.28
> 시간은 절대 가벼워지지 않기에
.어둠.
알츠하이머를 겪는 연쇄살인범 김병수의 이야기를 담은 이 책은 주인공의 독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때문에 마치 그의 일기를 엿보고 있는듯한 느낌을 준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던 살인자의 시각에서 세상을 바라보게 되는 경험은 새로우면서도 굉장히 불쾌하다. "죽인 사람보다 참고 살려둔 사람이 많다"(35쪽) 등의 말에서는 서늘함을 느끼고, 자신을 악마와 초인의 경계에 두는 오만함에서는 과도한 자존감의 역겨움을 느끼게 된다.
이 책은 경계에 놓인 책이다. 동시에 "선과 악, 삶과 죽음, 현실과 환상, 죄와 용서에 관한 어두운 사색"¹이다. 책 속 '살인자'라는 설정은 어두운 감정들을 극대화한다. 선과 악에서는 악이, 삶과 죽음에서는 죽음의 존재감이 짙어진다. 이러한 극대화 효과는 인간 본연의 혼돈과 어둠이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왜곡.
김병수의 독백은 '죄책감의 부정'과 '자기합리화'로 주를 이룬다. 죄책감을 덜기 위해 자신의 살인에 과도한 자부심을 부여함과 동시에 자기합리화를 통해 스스로의 기억을 조작한다. 그러나 그의 조작은 알츠하이머라는 병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진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에 선 그의 세계에서는 그가 빚어낸 혼란만이 남는다.
무언가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왜곡시키는 태도는 좋은 결과로 이어지기 힘들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다. 애써 외면해왔던 문제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 크기가 불어나 삶을 극한으로 몰아넣는 일이 흔하게 일어나기 때문이다. 책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자신의 죄책감을 덜기 위해 기억을 왜곡한 주인공이 파멸로 이르는 과정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자기합리화와 회피는 자기파괴뿐 아니라 합리화를 위해 사용된 외부장치들에도 영향을 미친다. 김병수의 경우에는 은희, 박주태라는 인물이 해당한다.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리플리 증후군이나 허언증 등도 마찬가지로 단순히 자신만이 환상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그들만의 세계가 현실과 뒤섞여 혼란을 야기하기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자기 환상의 세계는 본인 스스로에게는 허상의 구원이라도 안겨줄지 몰라도 사회적으로는 혼란만 가져다줄 뿐이다.
.시간.
사람은 기억이 쌓여 이루어진다. 과거가 쌓여 현재가 되기에, 현재의 내가 온전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기억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사람은 기억으로 산다. 심지어 이 책에 등장하는 살인자마저도 그렇다. 시간은 계속해서 흐르고 쌓인다. 시간은 계속해서 무거워질 뿐 절대 가벼워지지 않는다. 이 섭리를 거스르기 시작하면 그에 상응하는 역풍을 맞게 된다. '살인'으로 타인의 시간을 가볍게 여긴 김병수가 결국 알츠하이머로 본인의 시간의 무게마저 잃게 된 것처럼 말이다.
거짓은 거짓 자체로 악이 되지 않는다. 진실과 뒤섞여 분간할 수 없게 되었을 때 그것은 진정 '악'이 되어 세상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진실과 거짓이 뒤섞인 이 책처럼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이 악의 향기가 짙게 밴 책 속에서 나는 본능적으로 희망과 빛을 찾아 헤맨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나와 타인의 시간의 무게를 잘 짊어내 어둠을 걷혀내고 싶다는 귀결에 이르게 된다.
《살인자의 기억법》은 어떤 책이라고 단순명료하게 표현할 수 없는 책이다. 책의 사이사이의 여백에서 독자는 인물과 함께 호흡하며 자신의 생각으로 빈 공간을 채운다. 이 때문에 이 책은 여러 번 읽도록 독자를 움직이는 힘을 가진다. 더 많은 것을 알게 된 후, 이 책을 다시 읽으면 여백 사이의 새로운 세상을 엿볼 수 있게 될까? 독서가 끝난 후에도 끊임없이 떠오르는 의문 사이, 그럼에도 내가 유일하게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시간과 악의 두려움뿐이다.
출처
1) 출판사 제공 서평에서 인용하였다.
책 속 한 문장
무서운 건 악이 아니오.
시간이지.
아무도 그걸 이길 수가 없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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